인생의 선배

from hur cosmos 2010. 6. 17. 13:34

오늘은 종일 일진이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관람한 스페인 vs 스위스 경기는
스페인의 역사적으로도 굴욕적인 패배로 끝나버렸고
이후 집을 알아보고, 사람들과 연락하는 과정에서
나는 엄청나게 많이 짜증과 답답함이 밀려와있던 상태였다.

그렇게 늘어질 때로 늘어진 채로
나는 티셔츠+카고반바지+안경+캡 패션의 
두 대학원(졸업)생 오라버니들과의 저녁약속에 끼었다.

즐겁게 식사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난 후
성경공부 모임 내에서 해야되는 peer review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K오라버니와 단 둘이 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치만 역시나 감정적으로 날이 날이니 만큼.. 
나는 제3자들이 보면 오해할만한 그림을 만들어내고말았다. 
울어버림으로 인하여. (ㅜㅜㅜㅜㅜㅜ)

여튼, 이 분을 나 개인적으로 형용하자면 "도 튼 사람" 내지 어른 이었다.
내 주변에야 이 분보다 나이 많은 사람, 나보다 윗 세대를 사신 분들,
혹은 그냥 사회적으로 보았을때 어른 인 사람들 투성이다만
유독 나는 저 어른이라는 단어를 이 사람을 향하여 쓰곤 한다.

뭔가 한걸음 뒤에 서서 많은 것을 수용하는 넓은 아량,
여러 상황과 여러 사람들을 슬기롭게 상대하는 센스,
배려와 매너, 적당히 삼가는 듯한 것이 몸에 밴 듯한 행동들.
장난기는 또 어찌나 많으신지 11년이라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어린 꼬맹이의 좋은 놀림감이 자주 되시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그 분 뒤의 스며들어있는 그의 진지함과 성숙함을 많이 동경했다.

그런 K오라버니와 꽤 가까이 지내고 자주 보고 지내긴 했으나
둘이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 학기가 처음이고 오늘이 두번 째였다.
그러다 오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몇배는 더 희안찬란하고 격동이 심한 그의 인생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받은 그의 인상들은 역시나 그의 풍부한 경험들에 근거했군 싶었다.

내가 실제로 "도가 튼 사람"이란 인상을 늘 지니고 있었다 고백하며 시작된 화제 끝에 그는,
"아마 내 나이에 안맞는 희노애락을 많이 겪어서 그럴거야" 라고 겸손히 대답해주었다.

더더군다나 "수진아 너는 기분 나쁠 수도 있지만 우리 둘은 감정의 코드가 비슷한 것 같아"
라며 식사중에 스처지나가듯 하신 말에 공감을 표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겪어온 사건들 하나하나가 다 비슷할 순 없겠지만
어느 상황에 맞닥뜨렸을때 돌아가는 머리의 회전방식, 즉 사고방식이 꽤나 비슷한 듯 했다.

오늘 나는 대화 아닌 대화는 이틀에 걸처 바닥나버렸던 나의 기운과 자신감이 꽤 회복됐다.
성의없고, 그저 화제와 상황을 바꾸기 위한 위로나 격려의 말을 몹시 혐오하는 나지만
오늘 어제는 그 어떤 위로라도 받고싶었을 그런 상태에서 받은
진솔 플러스 한 언변 하시는 분의 격려는 몹시나 힘이 있었고, 따듯하고, 아렸다.

오빠가 아저씨여서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전 분명히 반해버렸을테고, 이 나쁜 남자로 인해 후엔 눈물을 흘리게 됐을 거에요ㅋㅋ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집으로 향해 돌아가던 중...
반짝거리는 반딧불이와 맞닥뜨려 순간 걸음을 주춤했다.
그러고나서 몇초 있다가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눅눅하고 찝찝한 공기를 들이키며 하늘을 처다보니,
저물어가는 하늘 위에 너무 예쁜 초승달이 떠있었다.

DC의 여름은 작년보다 쪼금 외롭지만 여전히 어딘가 굉장히 포근하고 굳건하다.


오라버니의 이곳에서 보낼 처음(?)이자 마지막(?) 여름이
뒤돌아봤을때 참 괜찮았다- 라 말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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