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홀로 집에 있으면서 손 빨래를 하는 중 내 머리와 귓가에 "청춘"이란 노래가 계속 맴돌았다. 어차피 재미있게 볼 것을 알았으나 초반 나의 관심을 끌지못했던 응팔을 다 따라잡았기 때문이겠지. 호돌이 해에 태어나 팔팔이 드디어 이렇게나 재조명을 받고 있지만서도 80년대말은 물론 90년대 초반 서울에 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나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공감보다는 드라마가 파는 추억을 뭣모르고 사고는 흐뭇하게 관람하는 시청자 한 명일 뿐이었다. 옛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 아주 없던 건 아니지만 잠길 추억이 없는 나는 상대적으로 무덤덤하게 봤었다는 것이다.
근데 갑자기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 생각이 나서. 가사를 유심히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김필이 부르는 이 노래의 멜로디를 상상하는 것 만으로 그렇게 구슬플 수가 없었다.
아빠 하면 이야기 보따리를 한 둘은 펼칠 수 있는 나지만, 그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수면 위에 오르는 나의 '감상'내지 '인상'은 부도덕하고 불성실하고 무책임했던 가장도 아니며, 말 그대로 찬란한 것을 잃어버린 인간이다.
중학교인가, 여튼 십대 시절, 부모의 separation이 내 안은 물론 가족들 사이에서도 공식화 되기 조금 전, 일본에 홀로 있던 그는 좇기는 신세가 되었었다. 그 소식을 처음 접했던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의 생명도 건강도, 금전 상황도, 그를 그 상황으로 몰아간 자도 아니고 그가 버리고 떠나야 했던 집에 있는 물건들이었다. 아빠가 아끼던 음반들. 많지는 않았으나 늘 그자리에 있었던 책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쳤던 전자 피아노.
나는 아빠를 많이 닮았다. 그리고 유년기 시절 추억은 대부분 아빠와 함께 쌓았기 때문에 내 안엔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유전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겠으나 이건 교육의 힘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나에게 온갖 스포츠를 관람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준 것도, 컴퓨터를 다루는 법을 알려준 것도, 게임을 포함한 온갖 전자기기를 제공해준 것도, 나와 함께 TV를 봐준 것도, 파바로티를 알려주고 조용필과 송창식을 언급해준 것도 모두 모두 아빠였다. 고상한 취미 따위 가질 시간 없이 살아온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그가 내게 물려준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에서 송혜교가 맡았던 정준영이 자기 아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이에게 보들레르를 읽어주며 시처럼 인생을 살라 하셨던 교양 있는 아빠. 드라마 주인공의 아빠와 나의 아빠는 전혀 전혀 다른 인물들이지만 그 설명 속에서 내가 아빠를 향해 가진 자부심과 애정의 모양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최근에 오랜만에 아빠 이야기를 한 탓도 있겠지. 그분과의 대화로 나는 위로를 얻고, 그 분은 뭔가 단서를 찾는 듯한 인상이 있었다. 외동딸은 가진 아빠로서, 그리고 나와 MBTI 및 에니어그램 성향이 같은 아내 분은 둔 남편으로써. 그리고 응팔이란 드라마, 그리고 그 노래까지 겹쳐져 이 사단(?)이 난 게 아닌가 싶다.
아빠는 어쩌면 나만큼은 아까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가 버릴 수 밖에 없던 그 많은 것들을. 어려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그런 것을 나름 즐기며 살았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은? 그가 살아온 세월을 보며 남들은 욕을 하고 비난을 하고 혀를 치겠지만 나만큼은 적어도 나만큼은 그걸 인정해주진 못해도 이해하고 싶다는 건 자만일까. 그치만 그런 거창한 '평가'를 그의 입으로 들을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그런 시간이 허락되어 있을까? 그가 그걸 객관적으로 논할 수 있는 정신이 아직 있을까?
지나가버린 세월을 두고 져버린 청춘을 두고 아빠는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나 있을까? 나 혼자 엉뚱한 걱정하는 거라고 자명되었음 좋겠다. 김창완은 이 노래를 아기 돌 때 지었단 이야기가 있던데, 그의 청춘은 얼마나 찬란했기에 싶다. 아 청춘의 무게가 고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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