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al diary'에 해당되는 글 34건

  1. 나를 알아가는 것, 당신을 알아가는 것 5 2010.12.09
  2. blush unseen 2010.11.21
  3. seeking your mercy 2010.11.20
  4. 로마서 5장 2010.10.10
  5. 유기한적 연단 2010.08.19
  6. 위선자의 최선 2010.08.08
  7. beyond my imagination 2010.08.05
  8. 핑계 없는 삶 2010.08.03
  9. 나의 하나님 2010.07.27
  10. 팔자와 열정 1 2010.06.05

아래는 이번 KBS webzine 2010년 가을 호에 투고한 나의 글이다.
나름 여러번 고쳐 쓴 것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재정신으로 다시 읽고 보니 참 불편하다.
알고는 있었지만 문장이 너무 길고.. 나 글 왜케 읽기 힘들게 쓰니?ㅋㅋㅋㅋ
글을 읽고 있는데 숨이 찰 정도야 헛헛헛.

여튼 이번 학기 처음으로 웹진을 섬겨보고, 글까지 써봤는데
참 유익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히히 :)



========================================================================================


언제인가 가졌던 KBS 모임에서 우리의 이기주의는 아주 철저히 우리의 마음과 유전자 속에 프로그래밍 되어있다는 표현을 들었었다. 그런 기본적인 죄성에, 여러 환경적 요소가 윤활유 역할을 해준 덕분일까? 남들한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의 관심사는 늘 구체적으로도 나 자신 이곤 했다. 취미와 특기를 자기묵상이라 말할 정도로, 나는 나 자신이라는 인물을 탐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웃기게 들리는 말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심도 있는 자아인식에 대하여 나름의 자부심 또한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Know Thyself”라는 소크라테스 선생의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던 나를 한 순간에 멍청이로 만드시고 전라가 되도록 까발리시는 존재가 딱 한 분 계시니 그것은 바로 You-Know-Who!


자기성찰을 즐길 수 있던 이유는 어쩌면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인식이 뒷받침 되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부터 웬만한 일은 똑 부러지게 잘 해와서, 칭찬 받는 모범생처럼 사는 것은 내게는 익숙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나는 처음 KBS 성경공부에 참석했던 학부 신입생 시절, 그 모임에서 성경공부가 진행되는 방식에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기는 했으나 체계화가 되어있진 않던 작은 교회에서 자랐기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 성경 공부는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였고, 어린 나이 치고는 꽤나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자부하던 내가 얼마나 성경적 지식이 얕은지 깨닫고는, 처음으로 신앙적 조급함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내가 직접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짧지 않는 시간이 걸렸으나, 머리와 가슴에 들어오기 시작한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와 섬김을 향한 열정을 발견하였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씀이 즐겁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모임은 나의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매우 좋은 도구가 또한 되어있었다. ‘나 이런 멋진 모임 나가는 사람이야,’ ‘이 정도 성경적 지식도 있어’라는 무의식이 “신앙 좋다”라는 말을 듣기 원하는 나의 자존감을 참 많이도 세워주었던 것 같다.


근데 사람이란 스스로 인정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며, 나에 대해서 아는 것은 곧 나에 대해서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에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마련이다. 공동체 내에서 양육과 훈련을 받고, 내가 그룹을 섬기게 된 이후에도, 내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남들이 나를 알아줬으면 하는 바램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기도제목으로 기도와 묵상을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도록 이라는 이야기는 비일비재하게 보이고는 한다. 지금 와서 보면 나의 경우는, 그건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소통을 회복하고 싶어서 내놓은 기도제목이라기보다는, ‘나는 말씀을 더 잘 보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사람이니깐’ 이라는 내가 세운 기준에 맞는 자신이 되기 위한 바램일 경우가 많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이런 나도, 말씀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영혼을 생각하는 절실한 마음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며, 매우 강하다 싶은 자기중심적 사고가 신앙인으로써 위험한 것은 아닌지 전혀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 했던 사도바울의 고백을 보며, 눈물 콧물 흘리며 ‘내 안에 내가 너무 커서 도저히 예수님 계실 곳이 없다’는 묵상을 했을 리 없다. 그렇지만 분명히 절실했던 그때의 회심과 묵상이 무색해질 만큼 나의 삶은 여전히 그리스도보다는 “내”가 살고 있다. 굳이 시니컬한 각도를 가지고 보자면, 전에 했다는 묵상이 가져다 준 눈물도, 어쩌면 나를 십자가에 못박지 못해 괴로웠다기 보다는, 바울이 한 그 고백을 나는 차마 할 수 없었다는 열등감으로 인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평상시 나와 자기 성찰 토크를 즐겨 하는 한 친구와 최근에 이야기를 나누던 중 “너는 너무 오만해”라는 말을 아주 직설적으로 들었다. 믿는 친구이기는 하나 공동체를 향한 상처가 있어 폐쇄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아직은 힘들 때 그리고 기쁠 때 찾고는 하는 종교적 차원의 하나님에 안주하는 듯 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던 친구였다. 어떻게 보면 신앙적으로는 내가 조금 내려다보던 그 친구가, 나는 자신의 신앙 생활 방식에 너무 도취되어있으며 나처럼 살지 않는 사람을 알게 모르게 배척한다는 지적을 내게 한 것이었다. 대화는 더욱 나아가, 높은 기준을 세워놓고 완벽주의자처럼 살고 싶어하는 나의 모습은, 자학으로까지 보인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내 딴에는 그리스도를 만난 자로써, 무의식 중에도 모습을 드러내는 죄성과 싸우는 성화의 단계라 확신하고 있던 나의 노력이, 한 순간에 율법주의적 자학이라 낙인 찍힌 순간이었다. 분명히 머리로는 알고 있고, 가끔은 입으로도 ‘나는 참 바리새인 같다’ 라는 고백을 해왔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재확인을 당하고 나니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아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쩐지 나의 신앙생활을 퍽퍽하고 기쁨이 넘치지 않더라.’ 늦은 시각 사람들 부쩍 거리던 식당에서 눈물범벅이 되어 괜히 웨이터들 걱정만 끼쳤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나의 죄인 된 참 모습을 인정하는 건 무지막지하게 자존심이 상한다. 인정만 하고 끝나면 차라리 낫지 이것을 등에 메고 거듭난 다는 것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동반하기도 한다. 생각보다 괜찮은 줄 알았던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로 전락하는 것을 실감하는 그 순간, 내가 그렇게 귀히 여기던 “나”라는 존재는 칼과도 같은 바람에 갈기갈기 찢겨버린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렇게 회오리 바람이 크게 한번 지나가주고 나면, 안개가 걷히고 그때서야 비로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둥 나의 마음 한 가운데 미동도 않고 서 있는 한 존재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입을 연다. “네가 그렇게 가슴 치도록 혐오하는 너의 모습마저도 내가 품었다 하지 않느냐. 나는, 나의 사랑은 너의 줄자로는 감히 잴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강한 자아를 처참히 뭉개버리시기도 하지만, 나의 그런 특성을 통하여 본인의 존재와 위치를 각인시켜주시는 걸 보니, 감사하게도 나의 인성을 참 존중해주시는 것도 같다. 그러나 더 이상은 속이 남아돌지 않을 정도로 나의 껍데기를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실 거라 생각하니 벌써부터 앞이 캄캄하다. 게다가 나의 죄라는 건 어째서인지 발견을 할 때 마다 그 무게와 더러움이 커지는 듯 해 그로 인한 좌절감도 매번 자라난다. 하지만 그것은 역으로 보자면, 하나님의 더 넓은 품을 경험한다는 뜻일 테고, 실감하는 은혜의 크기 또한 더 커져간다는 소리일 것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도 하지 않던가? 당신을 조금 더 정확히 그리고 깊이 알고, 경험할 수만 있다면, 나를 부정하는 아픔 따위 얼마든지 감수해보겠다고 조심스럽게 고백해본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8)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perfect ideal  (0) 2011.01.06
나름의 2011 Resolution  (1) 2011.01.03
blush unseen  (0) 2010.11.21
seeking your mercy  (0) 2010.11.20
로마서 5장  (0) 2010.10.10
,

blush unseen

from survival diary 2010. 11. 21. 15:52


위로보다는 긍휼을 구했다.
위로보다는 도전을 받았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위로와 사랑과 영감이 필요하던 나를
내던지시는 않으셨었나보다.

내 속의 이 텅빈 것을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채워주고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주고있다.
(물론, 본인들은 이런 내 심정을 모르겠지만..^^)

감사해야하나 슬퍼해야하나
일단 지금은 감사의 마음이 크다.

예수의 흔적이 내비쳐지는 사람을 만나는 기쁨.
내 자신을 부끄럽게, 하지만 또한 더 용기나게 만들어주네 :)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름의 2011 Resolution  (1) 2011.01.03
나를 알아가는 것, 당신을 알아가는 것  (5) 2010.12.09
seeking your mercy  (0) 2010.11.20
로마서 5장  (0) 2010.10.10
유기한적 연단  (0) 2010.08.19
,

seeking your mercy

from survival diary 2010. 11. 20. 05:16


詩(노래)를 읊을 수 없는 이 피폐한 심장을 어떡하리오
주를 찬양할 수 없는, 주를 주라 부를 수 없는 입술은 또 어떡하리오

How would you prove that you have been saved?
How would you prove that you truly believe?

What will be the proof of your faith?

싸우고 있기는, 나도 늘 마찬가지것만.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알아가는 것, 당신을 알아가는 것  (5) 2010.12.09
blush unseen  (0) 2010.11.21
로마서 5장  (0) 2010.10.10
유기한적 연단  (0) 2010.08.19
위선자의 최선  (0) 2010.08.08
,

로마서 5장

from survival diary 2010. 10. 10. 14:20

로마서5장으로 많이 괴로운 아침이었다.
금요일 밤보다는 토요일 아침이 몇배는 더 아프고 힘들었다.

세상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그 수류의 저항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니 그 흐름에 역행을 한다고 한다면
그 저항의 강도가 세지는 건 말할 것도 아니다.

그 환란.
불로만 상상을 했던 환란, 인내, 연단의 이야기를
물로 들으니 또 참 새로웠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합법적 불법.
그로 인해 폐지된 율법.

한 사람 
모든 사람
한 사람
많은 사람

묵상은 끝나지 않는다.


몇주째 이어진 lecture와도 같은 시간이
신앙의 선배님들의 수년 내공이 
내가 감히 파낼 수 없는 말씀의 깊이가

나의 부족함을 자책하고 괴로워하게끔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열정을 발견하며 성장을 갈망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또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blush unseen  (0) 2010.11.21
seeking your mercy  (0) 2010.11.20
유기한적 연단  (0) 2010.08.19
위선자의 최선  (0) 2010.08.08
beyond my imagination  (0) 2010.08.05
,

유기한적 연단

from survival diary 2010. 8. 19. 10:29

유대 민중들이 구하고 기다렸던 구원과
예수가 실제로 가지고 온 구원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음을 알기에
우리가 어떤 것을 구해야하는지
무엇이 우리가 품어야 할 옳바른 소망인지를 알기에
더 기도를 하지 못하겠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를 읊으며
참된 천국은 고통 속에도 있을 수 있다며
지금의 "여러운 상황"이 지속될거라 저주를 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믿으면 무조건 지금 처해있는 그 세속적 억압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다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디가 당신의 바닥인지 나는 더 이상 알고싶지 않다
라고 언젠가 부르짖던 나의 탄식이 뇌리를 스친다.
정녕 이 상황에 끝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모세나 요셉이 겪었던 유기한적 연단이 아니라는 것인가.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seeking your mercy  (0) 2010.11.20
로마서 5장  (0) 2010.10.10
위선자의 최선  (0) 2010.08.08
beyond my imagination  (0) 2010.08.05
핑계 없는 삶  (0) 2010.08.03
,

위선자의 최선

from survival diary 2010. 8. 8. 13:03

옳지 않은 것을 증오하고
비합리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나.

남들에게는 그 엄격한 잣대를 갖다대어 
정죄와 비판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면서,
정작 내 자신에게는 얼마나 무르고 관대한지
그 모순에 역겨움을 느낄 때가 오곤 한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내 뜨거운 화잉을 맞는 것일지언정
그것이 숨통을 트기 위한 방법인데 어쩔꼬.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열심히 구하면
쉽게 그리고 빨리 변화될 수 있을 줄 알았나보다.
동기가 잘못됐던건 간에 방법에 문제가 있었던 간에
내가 이 여정을 만만하게 봤음에 의심의 여지는 없다.

어쩔 수 없다.
이게 지금의 나의 최선의 방식이고
이것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면 돌아서는 수 밖에.

야속하다 욕 먹어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어쩌면 내가 최선이라 부르는 이것마저도 
단순히는 책임 유기일 수 있으니.

이것이 정녕 사랑이라면
내 기꺼이 변해볼터니
이 길에 작은 빛 하나만 비춰다오.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5장  (0) 2010.10.10
유기한적 연단  (0) 2010.08.19
beyond my imagination  (0) 2010.08.05
핑계 없는 삶  (0) 2010.08.03
나의 하나님  (0) 2010.07.27
,

beyond my imagination

from survival diary 2010. 8. 5. 23:51

우리의 수많은 단골멘트 중 "상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 하셨다" 가 있다.
이런 간증은 주로, 우리가 한 어려움을 직면하고는, 그것을 두고 기도 하다가
그 문제를 어떻게 풀어주셨는지를 경험하고 나오고는 한다.

흔해빠진 것으로 인하여 자존심을 많이 상해하는 나 이지만
특히 지금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저 멘트는
주를 영접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불가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 반대로...
저 말을 난발한다는 것은 즉 우리의 상상력의 한계를 여러번 겅험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즉 우리는 보잘 것도 없는 우리의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
이래저래 내 갈 길을 계획했다는 소리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분은 모든 것을 뛰어넘으시는 분이 분명히 고백하면서
막상 우리의 삶 속에서는 "나의 설계도"를 구상하느냐 바쁘다.

여튼 그렇기 때문에 반전쟁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오나보다.
난 근데 이런 모습 싫지 않아...ㅋㅋㅋ

단지 꼭 모든 문제 해결이 반전을 통해 이뤄지지만은 않는다는 것.
그러면 참 해피엔딩 룰루랄라 일테지만
우리가 차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제 제공을 하실 때도 있으니
이것이 정말로 환장할 노릇인 거다.

최악을 상상해두는 건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타격을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함.
최고를 상상해놓고 잊으려고 노력하는 건 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의 어설픈 믿음과 자기방어의 실체다 이것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게 무서워서 기도하지 않는다 라는 핑계가
정말 유치찬란뽕짝브루스를 달린다는 것을 앎에도 불과하고
나는 내 자신을 지나치게 사모해서 이렇게도 자기방어에만 에너지를 쏫는다.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되게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

아버지의 뜻을 고대하며 그 뜻대로 하시라는 고백을 우리는 너무 쉽게 하는 것 아닐까 싶다.
물론 그런 고백 하나하나가 다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저 말씀을 하신 분의 진실성과 간절함에 비교했을 때... 말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저건 진짜 초고수의 맨트다.
차마 내가 입에 담기에도 너무 엄숙한.

그러니 나는 오늘도 내 표현의.. 수많은 어설픈 믿음 소유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속삭여본다.
"내가 차마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도해주세요."
물론, 중요한 것은 '인도해주세요' 안에 내포되어있는 애교심리.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기한적 연단  (0) 2010.08.19
위선자의 최선  (0) 2010.08.08
핑계 없는 삶  (0) 2010.08.03
나의 하나님  (0) 2010.07.27
팔자와 열정  (1) 2010.06.05
,

핑계 없는 삶

from survival diary 2010. 8. 3. 13:44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찾지 않음에 대한 정당한 이유, 변명거리는 되지 못한다.

언젠가 일기로 썼던 이 한 마디가
잠을 청하려는 내 입에서 한 없이 반복되었다.

당신 앞에 핑계가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라.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선자의 최선  (0) 2010.08.08
beyond my imagination  (0) 2010.08.05
나의 하나님  (0) 2010.07.27
팔자와 열정  (1) 2010.06.05
용서의 대상  (0) 2010.05.27
,

나의 하나님

from survival diary 2010. 7. 27. 11:5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닙.
나의 하나님.

침묵의 하나님.
응답의 하나님.
반전쟁이 하나님.
악취미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고향 하나님.
반석 하나님.
애정결핍 하나님.
로맨티스트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
닿지 않는 하나님.
가장 높은 곳 하나님.
가장 깊은 곳 하나님.
피난처 하나님.
신 하나님.

나의 하나님.

비록 당신이 사람이 만들어낸 한낱 종교의 신일지언정 나는 당신을 믿겠다 함은
발칙한 발언이지만, 나의 믿음의 한계의 고백이기도 했다.

당신은 크시다는데, 내 안에서 너무 작아져버리신 나의 하나님.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beyond my imagination  (0) 2010.08.05
핑계 없는 삶  (0) 2010.08.03
팔자와 열정  (1) 2010.06.05
용서의 대상  (0) 2010.05.27
기억  (0) 2010.05.18
,

팔자와 열정

from survival diary 2010. 6. 5. 14:04



며칠 전 김연아 선수가 무릎팍도사에 나왔을때 본인과 피겨와의 관계를
"팔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했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순간, 중학교 시절 마포에 살던 아파트 내 작은 방에서 문득 
'아아, 나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게서 반항을 해도 어차피 돌아오겠구나.'
라는 소소한 확신, 선언, 장담, 예감... 을 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실제로 내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팔자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 적도 있는 것 같고..ㅎㅎ


그 연장선으로 또 한번 나는 나의 팔짜에 무릎을 꿇게 된 이야기.

성경공부 모임이 각 지역별로 여름방학 모드에 돌입하게 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네 가지 다른 반으로 나뉘어, 본인의 need에 따라 고르는 것이었는데
그 중 나는 구약반 (여호수아를 볼 예정)에 들어갈 생각은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1-2장을 커버하며 양은 많겠지만 내가 편하게 있다갈 수 있는 반 같아서..

근데 나의 마음 저 깊은 곳은 심화반이라 불리는
매주 사도행전의 한 장씩을 "본인이 그룹 인도하듯 묵상해오는' 반을 향한 미련이 계속 남아있었다.
일단 대표간사님께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내게는 꽤 매력적이고
무엇보다... 이 반을 선택해서 방학중에도 빡세게 묵상하는게 나를 위한 것이긴 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잘 알고있다. 하하.

마음과 몸이 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달라서 오늘 모임 직전까지도 고민 아닌 고민을 했다.
그런데 이번 주 계속 고민을 하면서 (사실 표면적 고민일 뿐 내 갈길은 예정되있었던거나 마찬가지다ㅎㅎ)
내 안에 내가 거부하고싶지만 그럴 수 없는 말씀을 향한 열정 엇비슷한 것이 있구나 싶었다.
이런 것이 존재할 수도 있겠다 라는걸 새삼 자각하게 만든 것도 대표간사님이셨는데.
묵상훈련 발표때 본 빌립보서 1장에서 나오는 바울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나를 보시며말이지.


"간사님. 마음을 따라야 할까요 몸을 따라야 할까요?"
"흠.... 글쎄요. 마음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음을 따르면 몸이 힘들어지는데도요?"
"어릴때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잖아요. 하하하^^"

이로서, 나는 여름 동안에 사도행전을 묵상하게 되었다.
내가 처음 KBS 성경공부 모임에 참여했을 때 보던 책이다.
역시나 재미있을 것 같다 두그두그두그두그.

'survival di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핑계 없는 삶  (0) 2010.08.03
나의 하나님  (0) 2010.07.27
용서의 대상  (0) 2010.05.27
기억  (0) 2010.05.18
개와 소를 경외하다  (1) 2010.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