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림픽 남자 축구 한일전을 보고난 후, 여유로히 온라인 댓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포인트는 일본 포털사이트에서 그랬다는 것.. 거의 자멸의 분위기였던 걸 감안했을 때 나도 참 악취미다. 잉여력 UP.
그래도 이토록 집중+흥분 하며 본 축구경기는 지난 아시안 게임 결승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2. 히브리서 2장을 볼 수 있었다. 원래는 가지 못할 예정이던 금요 성경공부 모임에서 히브리서를 보는데.. 컨디션이 안좋았던 것도 있다지만 이거는 너무 어렵자낰ㅋㅋㅋㅋㅋㅋㅋㅋ 괜히 히브리서가 아니었음.
그렇지만 하나 깨달은 사실 하나. 나는 내러티브보다는 서신서가 쬐끔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아 근데 그건 정해진 같은 양의 시간을 할애하며 두 다른 종류의 말씀을 묵상한다 쳤을 때...나를 조금 더 두근거리게 만들고 말씀을 향한 열정을 타오르게 만드는 건 서신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것은.. 내가 내러티브로 되어있는 (가령 복음서들)을 아직 잘 볼 줄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우리가 익히 들어온 비유의 해석을 뛰어넘는 나만의 묵상이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는, 내가 서신서를 통하여 경험하는 eureka moment보다 더한 희열이 경험할 것 만 같은데.. 그게 쉽지가 않다. 끙.
언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구절 내지 표현을 가지고 미친듯이 시름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히 사랑은 관계적 용어인데, 분명히 대상이 필요한 것일텐데, 태초에 홀로 (차후 이게 살짝쿵 오류라는 걸 알게됐지만..ㅋ) 계셨던 하나님이 이것을 어떻게 하셨으며, 어떻게 그 존재 자체를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라는 고민.
이 궁금즘(?)이 약간 해결될 때 쯤, 나는 죄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성경적으로 우리 인간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죄 또한 역시 관계적 용어인 샘이다.
20대 초중반이 되서야 인정하게 된 사실 하나는, 나는 굉장히 우울한 측에 속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나의 default status는 늘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며, 기쁘고 행복하기보다는 짜증과 우울이 조금 더 압도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외동으로 태어나서 자라고, 홀로 있는 시간이 익숙하고 또 긴 나는 이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쉴 새 없이 누군가와 소통해야되는 상황이 오기 전 까지는.
나도 내가 이렇게 기분이 늘 나쁜 사람인 줄 몰랐다. 이렇게 쉽게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_-; 그렇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서 자꾸 소통을 하다보니, 혼자 있을 땐 깨닫지도 못했던 나의 감정이 당연히 더 표현되어지고.. 그것으로 하여금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내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만큼 자주, 적나라하게 고질적인 나의 문제들이 폭로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나의 악함이라 표현할 수도, 약함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나의 깊고 깊은 죄성은, 관계 안에서 그 모습을 조금 더 선명히 드러낸다. 이것으로 하여금, 죄가 어째서 관계적 용어인지.. 우리의 신앙을 어째서 그리도 '관계'라는 측면으로 바라봐야 하는지를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